유행이 지나간 자리에서 발견한 것

옷을 읽는 도서관
에르메스, 디올, 프라다, 마르지엘라.
이름만 들으면 명품 매장이 떠오르지만, 멜버른의 한 작은 방에 걸린 옷들은 모두 판매하지 않습니다. 대신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줍니다.
이곳은 패션 디자이너 해나 캔햄이 만든 ‘디스 에라 아카이브(This Era Archive)’. 약 1,000벌의 빈티지 옷을 보유한 패션 도서관입니다.
옷은 화면만으로 알 수 없으니까
해나는 뉴욕과 마드리드, 베를린, 런던, 파리 등을 오가며 10여 년 동안 옷을 모았습니다.
그가 수집하는 기준은 유명한 브랜드나 높은 가격이 아닙니다. 독특한 재단, 예상 밖의 비율, 아름다운 단추와 주름처럼 남들이 그냥 지나칠 만한 작은 차이를 먼저 봅니다.
그에게 오래된 옷은 감상하는 물건이 아니라 직접 펼쳐 읽는 자료입니다.
옷 안쪽은 어떻게 마감했는지, 원단은 얼마나 무거운지, 몸 위에서 어떤 모양으로 떨어지는지는 사진만으로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찾은 디자이너와 학생들은 옷을 만지고, 뒤집어 보고, 실제 모델에게 입혀보며 새로운 디자인의 단서를 발견합니다.

빌려주지만, 화보 촬영은 안 됩니다
이 도서관에는 조금 의외인 규칙이 있습니다.
디자이너의 연구를 위해서는 옷을 빌려주지만, 스타일리스트나 화보 촬영에는 빌려주지 않습니다. 촬영장에서 귀한 옷이 흙에 닿거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의 손에 함부로 다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여에서 돌아온 옷은 해나가 직접 상태를 살피고 수선합니다. 보존용 종이에 싸서 보관하고, 한 시즌 동안 충분히 쉬게 한 뒤 다시 내어놓습니다.
수집은 물건을 많이 갖는 일이 아니라,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책임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옷장이 다음 유행이 되기까지
패션은 언제나 과거를 다시 바라봅니다.
오래된 옷의 칼라와 주름, 봉제 방식처럼 사소해 보이는 요소가 다음 시즌의 새로운 디자인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해나의 컬렉션은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누군가 옷을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는 순간, 다시 미래의 패션이 됩니다.
당신의 옷장에도 유행이 지나서가 아니라, 여전히 마음을 움직여서 간직하고 있는 옷이 있나요?
어쩌면 그 옷은 낡은 옷이 아니라, 아직 다 읽지 못한 당신의 취향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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