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병씩, 사라진 시대를 모으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소주병 3,000개를 모았습니다
초록색 병에 담긴 투명한 술.
지금 우리에게 소주병은 대부분 비슷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갈색 병에 담긴 소주, 코르크 마개로 닫은 소주, 학과 거북이 그려진 소주. ‘왕천’, ‘쌍선’, ‘백구’, ‘팔선’처럼 이제는 이름조차 낯선 지역 소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라진 소주병을 40년 넘게 모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주 수집가 도창종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소주병을 모았을까요?

버리기 아까워 남겨둔 한 병
도창종은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1982년 금복주의 디자인실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소주 라벨과 포장을 디자인하며 다른 회사의 제품과 옛 상표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후 재고관리까지 맡으면서 더는 판매하지 않는 오래된 소주를 정리할 일이 생겼습니다. 회사에서는 팔 수 없는 재고를 버리라고 했지만, 그의 눈에는 그 병들이 단순한 폐기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병의 색도, 모양도, 라벨의 글씨와 그림도 지금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버려질 소주를 하나둘 남겨두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수천 병을 모으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사라지기에는 아까운 병을 한 개씩 보관했을 뿐입니다.
그 한 병이 수집의 시작이었습니다.
800병이 3,000병이 되기까지
그가 소주병을 모은 시간은 40년이 넘습니다.
2005년에는 약 800병이었던 컬렉션이 2020년에는 2,000여 병으로 늘었습니다. 2023년 보도에서는 1950년대 이후 생산된 소주 약 3,000병을 모은 것으로 소개됐습니다.
그중에는 아직 뚜껑조차 열지 않은 1950년대 소주도 있습니다. 상표에 두꺼비가 선명하게 그려진 오래된 진로, 코르크 마개를 사용한 1960년대 소주, 알코올 도수가 30도에 달하는 1970년대 금복주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 마트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술들입니다.
그가 보관하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빈 병과 함께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코르크 마개가 달린 소주를 아시나요?
오늘날 소주병은 금속 뚜껑을 돌려 여는 방식이 익숙합니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와인처럼 코르크 마개를 사용한 소주도 있었습니다.
이후 왕관 모양의 금속 병마개가 등장했고, 다시 지금과 같은 형태의 뚜껑으로 변화했습니다.
병 색깔도 달랐습니다. 지금은 초록색 병이 익숙하지만 과거에는 투명하거나 갈색인 소주병이 많았습니다. 1980년대부터는 종이 라벨을 보호하기 위한 코팅도 본격적으로 사용됐습니다.
병 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의 인쇄 방식과 포장 기술, 유통 환경이 보입니다.
소주병은 술을 담는 용기인 동시에 그 시대의 기술을 기록한 작은 타임캡슐이었던 것입니다.

옛날 소주병에는 왜 학과 거북이 많았을까?
라벨에 그려진 그림에서도 시대의 취향을 읽을 수 있습니다.
1960~70년대 소주 상표에는 학, 거북, 소나무, 사슴처럼 장수와 복을 상징하는 십장생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술을 마시는 일이 단순한 음주가 아니라 풍류를 즐기고 좋은 시간을 나누는 행위로 표현됐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보리와 같은 곡물이나 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가 늘어납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건강과 원료로 이동한 흔적입니다.
이후에는 초록색이 소주의 대표 색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맑고 깨끗하며 부드러운 인상을 전달해 소주의 강한 이미지를 줄이기 위한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이 술에 기대하는 이미지도 달라졌고, 그 변화가 작은 라벨 안에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소주에도 고향이 있던 시절
도창종의 컬렉션에는 지금은 사라진 지역 소주가 많습니다.
경북 상주에는 ‘원앙’, 청도에는 ‘팔선’, 충북에는 ‘왕천’과 ‘백학’이 있었습니다. 전북에서는 ‘백화’, ‘쌍선’, ‘보배’를 마셨고, 경북에는 ‘백구’, 제주에는 ‘한일’, 대전에는 ‘선양’이 있었습니다.
같은 소주라도 지역마다 이름과 병 모양, 상표가 달랐습니다. 라벨에는 각 지역이 좋아했던 색과 상징,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감각이 담겼습니다.
과거에는 여행지의 식당에서 처음 보는 소주를 만나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지역의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 지역의 이름과 이야기를 함께 경험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소주병을 지역별로 늘어놓으면 또 하나의 대한민국 지도가 완성됩니다.
지도 위에 도로와 지명이 표시되듯, 병 위에는 한때 그 지역에서 사랑받았던 이름과 이미지가 남아 있습니다.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
도창종은 자신이 모은 소주를 혼자만 간직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005년에는 직접 비용을 들여 비매품 도록 《한국의 燒酎》를 만들었습니다. 소주의 유래와 제조법을 정리하고, 회사별 소주병 약 350점과 1950~60년대 상표 약 100점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수집한 물건을 분류하고 촬영해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자료로 바꾼 것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술의 가격이나 맛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회사가 어떤 이름으로 술을 만들었는지, 병과 라벨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안에 어떤 지역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가 모은 것은 술이 아니라 술에 담긴 시간이었습니다.
평범한 물건이 역사가 되는 순간
처음부터 소주병이 귀한 유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마시고 버리는 병이었고, 회사에는 더 이상 판매할 수 없는 오래된 재고였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오랜 시간 모으자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병 하나만 보면 오래된 소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수천 개의 병을 연도와 지역에 따라 나란히 놓으면 한국의 디자인과 산업, 유통 기술과 지역문화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 됩니다.
수집은 원래 특별한 물건을 갖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지나치거나 버리는 것에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꾸준히 연결해가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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